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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시대의 혼란과 고려 건국 #태조 왕건 #후삼국 통일

by erudispot 2025. 5. 22.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오늘은 후삼국 시대의 혼란고려 건국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후삼국시대가 도래하고, 또 고려가 어떻게 건국을 하였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통일신라의 위기

 

 통일신라의 위기에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왕권의 약화와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었습니다.

 

통일신라 말기로 갈수록 왕권은 점점 약해지고, 대신 진골 귀족들 간의 권력 다툼이 심해졌습니다.

 

서로 왕이 되기 위해 싸우는 통에 정치는 불안정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습니다.

 

'골품제'라는 신분 제도 역시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발전을 가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능력보다는 혈통이 중요시되면서, 불만이 쌓여갔죠.

 

또한, 지방 세력의 성장과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도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자, 지방에서는 스스로 힘을 키운 호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지역에서 세력을 키우고, 중앙 정부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에 대한 수탈도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하니 국가 재정도 어려워지고, 결국 사회 전체가 불안정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통일신라 말기에는 곳곳에서 도적 떼가 들끓고, 먹고살기 힘든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등 사회 혼란이 극에 달했습니다.

 

대표적인 농민 봉기가 바로 원종과 애노의 난, 적고적의 난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죠.

 


후삼국 시대의 개막

 혼란스러운 통일신라 말기, 새로운 세력이 각자 나라를 세우면서 우리 역사는 다시 '삼국'으로 나뉘는 시대를 맞이합니다.

 

이를 후삼국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를 이끈 주역들은 바로 견훤, 궁예, 그리고 왕건입니다.

 

견훤, 후백제: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던 견훤은 무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통일신라의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백제 유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900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하여 후백제를 건국했습니다.그는 옛 백제의 영토를 회복하고 신라를 압박하며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습니다.

 

궁예, 후고구려: 신라의 왕족 출신이지만 버림받아 승려가 된 궁예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신라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북원(지금의 원주)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웠습니다. 송악(지금의 개성)의 호족 왕건을 자신의 휘하에 두기도 했죠.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나중에는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민심을 얻고 세력을 확장했지만, 점점 폭군적인 성격과 미륵을 자처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며 주변의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통일신라의 몰락: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건국되면서 통일신라는 사실상 이름만 남은 상태가 됩니다. 경주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작은 세력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견훤의 후백제 군대에 의해 경주가 함락되고, 경애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후삼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궁예 휘하에 있던 왕건이라는 인물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왕건은 개성의 유력한 호족 출신으로, 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재력을 쌓고 있었고,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는 덕망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궁예가 점점 포악해지고 신하들을 의심하며 죽이는 일이 잦아지자, 그의 부하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918년, 왕건을 추대하고 궁예를 몰아냈습니다. 이로써 왕건은 새로운 나라, 고려를 건국하게 됩니다.

 

고려의 건국 이념과 정책: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민족 통합: 왕건은 통일신라의 정책과는 달리, 후백제와 옛 고구려 세력을 아우르려는 포용 정책을 펼쳤습니다. 특히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하여 북방 영토 회복에 대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신라가 항복해오자 평화적으로 받아들이고, 신라의 귀족들에게 관직과 토지를 주는 등 통합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호족 포섭: 왕건은 각 지방의 호족들을 무조건 탄압하기보다는, 그들을 포섭하고 협력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유력 호족의 딸들과 결혼하여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성씨를 내려주거나 관직을 주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협력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이를 통해 지방의 반발을 줄이고 국가의 안정을 꾀했습니다

 

민생 안정: 왕건은 세금을 낮추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등 민생 안정에 힘썼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흑창'이라는 구휼 기관을 설치하여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갚게 하는 등 백성들의 삶을 돌보는 데 신경 썼습니다.

 

후삼국 통일: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제 후백제와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후삼국을 통일해야 했습니다. 공산 전투에서 큰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고창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결국 후백제 내부의 분열, 견훤의 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금산사에 가두고 왕위를 빼앗은 사건을 틈타 견훤이 왕건에게 귀부하면서 고려는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마침내 936년,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다시 통일하게 됩니다.

 

 


 후삼국 시대의 혼란과 왕건의 고려 건국을 통해 우리는 변화와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찾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유익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도 귀중한 시간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