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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대외 관계 #거란의 침입 #여진 정벌 #몽골의 침입

by erudispot 2025. 5. 22.

 

 

 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려의 대외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북방 민족들과 끊임없이 부딪히며 때로는 강하게 맞서 싸우고, 때로는 지혜롭게 외교를 펼치며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특히 거란, 여진, 몽골이라는 강력한 세력들의 침입은 고려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최대한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오늘도 열심히 집필하도록 하겠습니다.

 


거란의 침입과 강동 6주

 고려 초기, 만주를 장악하고 있던 가장 강력한 세력은 바로 거란족이었습니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멸망시키고, 송나라와도 대립하며 동아시아의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고려를 복속시키고 송나라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1차 침입 (993년, 서희의 담판): 거란의 1차 침입은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크게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뛰어난 외교관인 서희가 나섰습니다. 그는 거란군 진영으로 찾아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자이므로, 너희가 차지한 옛 고구려 땅을 돌려주면 우리는 거란과 교류할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압록강 동쪽 지역은 우리 땅인데,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어 너희와 교류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기가 막힌 논리로 서희는 거란군을 철수시키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 땅이었던 강동 6주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2차 침입 (1010년, 강조의 정변): 강동 6주를 차지한 고려는 여전히 거란과의 교류를 꺼려 했습니다. 게다가 고려 내부에서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는 혼란이 발생하자, 거란은 이를 핑계 삼아 다시 침략해왔습니다. 거란의 성종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내려왔고, 고려는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양규와 김숙흥 같은 장수들이 분전하여 거란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결국 거란은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하고 철수했습니다.

 

3차 침입 (1018년, 귀주대첩): 거란은 2차 침입 때 얻은 것이 없자, 다시 한번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려가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흥화진에서 거란군을 물리치고, 결정적으로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주력 부대를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여진 정벌과 윤관의 별무반

 거란의 위협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만주 동북부에 살던 여진족이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여진족은 본래 고려에 조공을 바치던 약한 민족이었지만, 점차 세력을 키워 고려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윤관의 별무반 조직: 고려 예종 때, 여진족의 침략이 심해지자 윤관 장군은 여진족의 기마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부대가 필요하다고 왕에게 건의했습니다. 그래서 조직된 것이 바로 기병 중심의 특수 부대인 별무반입니다. 보병 중심의 '보병', 기병 중심의 '신기군', 승려들로 이루어진 '항마군' 등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였습니다.

 

동북 9성 개척과 반환: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크게 물리친 후, 여진족의 땅에 동북 9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하지만 여진족은 9성을 돌려달라고 간청했고, 고려는 9성을 지키는 데 드는 비용과 병력 소모, 여진족의 끈질긴 저항 등을 고려하여 결국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게 됩니다. 비록 9성을 돌려주었지만, 이는 고려가 북방 지역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동북 9성을 돌려받은 여진족은 이후 세력을 더욱 키워 금나라를 세우고 거란을 멸망시킨 후, 고려에게 군신 관계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고려는 처음에는 강력히 반발했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결국 금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고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몽골의 침입과 대항

 13세기, 동아시아는 물론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뒤흔든 강력한 제국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몽골 제국입니다.

 

몽골은 약 30년 동안 무려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으며, 이는 고려 역사상 가장 큰 시련이었습니다.

 

 

몽골의 침입 배경: 몽골은 거란족을 추격하다가 압록강을 넘어 고려의 강동성까지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서 고려-몽골 연합군이 거란을 물리치는데, 이때부터 몽골은 고려에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고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몽골 사신 저고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몽골은 이를 빌미로 1차 침입을 감행했습니다.

 

최씨 무신 정권의 강화도 천도: 몽골의 1차 침입 때, 고려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씨 무신 정권은 몽골군의 기병에 맞서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강화도는 몽골군이 배를 타고 들어오기 어려운 지형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수도가 옮겨진 사이 육지에 남겨진 백성들은 몽골군의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백성들의 항쟁과 영웅들: 최씨 정권이 강화도로 도망갔지만, 육지에 남은 고려 백성들은 몽골군에 맞서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처인성 전투에서 승려 김윤후가 몽골 장수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몽골군에게 큰 타격을 주기도 했고, 충주성 전투에서는 노비들이 몽골군에 맞서 싸워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백성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몽골군에 저항했습니다. 이들의 항쟁은 비록 나라의 지원은 미약했지만,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위대한 노력이었습니다.

 

삼별초의 항쟁: 몽골과의 오랜 전쟁 끝에 결국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무신 정권의 사병 집단이었던 삼별초는 몽골에 대한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항쟁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은 배중손의 지휘 아래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가며 몽골과 고려 정부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비록 결국 진압되었지만, 삼별초의 항쟁은 몽골에 대한 고려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원 간섭기: 몽골의 침입이 끝난 후, 고려는 몽골 제국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왕위 계승에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지고, 공녀와 공물을 바쳐야 했으며, 내정에도 간섭을 받았습니다. 고려의 영토 일부가 원나라의 직접 지배를 받는 '쌍성총관부'나 '동녕부' 등으로 편입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를 원 간섭기라고 부르는데, 고려의 자주성이 크게 훼손된 아픔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자주성을 완전히 잃지 않고, 공민왕과 같은 개혁 군주들이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펼쳤습니다.

 

 

*환도 - 수도를 다시 옮김


고려 대외 관계의 의미

 고려는 거란, 여진, 몽골이라는 강력한 북방 민족들의 침입을 겪으면서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고려는 민족의 단결력을 보여주고, 국난 극복을 위한 지혜와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국난 극복의 역사: 고려는 대외적인 위협 속에서도 끈질기게 저항하며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서희의 외교 담판, 강감찬의 귀주대첩, 김윤후의 처인성 전투 등은 고려인들의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자주성의 유지 노력: 비록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도 했지만, 고려는 중국의 다른 왕조들처럼 완전히 멸망하거나 흡수되지 않고, 자신들의 왕조를 유지하며 자주성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가진 저력과 외교적 역량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문화의 보존과 발전: 외침 속에서도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조판하는 등 불교 문화를 꽃피웠고, 금속 활자와 같은 인쇄술을 발전시키는 등 뛰어난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켰습니다. 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보여줍니다.

 


 

 고려의 대외 관계는 단순한 전쟁의 기록을 넘어, 위기 속에서 빛난 고려인들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격동의 시기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도 유익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역사를 함께 이야기하며 소중한 시간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