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오늘은 발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드넓은 만주 벌판에서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렸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입니다.
발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지만, 모두 아시다시피 당나라의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옛 고구려의 넓은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 남쪽에 자리 잡았다면, 고구려의 옛 영토, 즉 만주 벌판에는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많은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에 끌려가거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구려의 재건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든 인물이 바로 대조영입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당나라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며 698년에 동모산에 도읍을 정하고 발해를 건국했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진(震)'으로 정했다가, 나중에 '발해(渤海)'로 바꾸게 됩니다.
발해의 건국은 단순한 한 나라의 탄생을 넘어, 고구려 부흥 운동의 결실이자, 한반도 북방에서 우리 민족이 주도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신라가 남쪽에 있었다면, 발해는 북쪽에 자리 잡아 '남북국 시대'라는 독특한 시대를 열었습니다.
해동성국, 바다 동쪽에 있는 번성한 나라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며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특히 몇몇 왕들의 활약은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왕: 발해 초기, 2대 왕인 무왕은 강력한 대외 정책을 펼쳤습니다. 당나라와 대립하며 요서 지방을 공격하기도 했고, 북쪽의 흑수 말갈이 당나라와 손잡으려 하자 장문휴를 보내 등주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이는 발해가 더 이상 당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독자적이고 강력한 국가임을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왕 시기 발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습니다.
문왕: 무왕의 뒤를 이은 3대 왕인 문왕은 '중흥의 군주'로 불릴 만큼 발해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무왕 때 확장된 영토를 안정시키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데 힘썼습니다. 당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발해의 독자적인 형태로 소화하여 발전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3성 6부 제도를 받아들이되, 명칭을 독자적으로 바꾸고 운영 방식에도 발해의 특색을 반영했습니다.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과 같은 발해만의 관제 명칭들이 이를 보여줍니다. 문왕 시기에는 수도를 여러 번 옮기며 국가의 중심을 잡아갔고,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수도로 정비하며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고 유학 교육 기관인 주자감을 설치하는 등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발해는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안정과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선왕: 발해의 10대 왕인 선왕 시기는 발해의 영토가 최대로 확장되고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때입니다. 그는 북쪽의 거란족을 복속시키고, 옛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회복했습니다. 요동과 연해주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오늘날의 만주 대부분과 연해주, 그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발해는 주변국들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송을 받게 됩니다. 이는 바다 동쪽에 위치한 나라들 중에서 가장 번성하고 강력한 국가라는 의미로, 발해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발해의 문화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답게, 고구려의 기상과 문화적 특징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발해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건축과 도시 계획: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는 당나라의 장안성을 본떠서 건설되었습니다. 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였고, 궁궐이 도시의 북쪽에 위치하는 등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경용천부에는 궁궐터 외에도 온돌을 사용한 주거지나, 당나라 양식과는 다른 독특한 건축 흔적들이 발견되어 발해만의 독자적인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발해의 궁궐터에서 발견되는 기와나 벽돌에는 고구려의 강인한 기상이 담긴 문양들이 새겨져 있어,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불교 문화: 발해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크게 융성했습니다. 발해의 불교 유물들은 고구려 불상과 당나라 불상의 특징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발해만의 독특한 양식을 보여줍니다. 영광탑과 같은 벽돌탑은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양식에서는 발해의 독자적인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발해의 불상들은 고구려 불상처럼 단단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레바퀴 자국과 교통: 발해 유적지에서는 폭이 매우 넓은 수레바퀴 자국이 발견되곤 합니다. 이는 당나라나 신라의 수레바퀴 자국보다 훨씬 넓은 것으로, 고구려의 넓은 도로 폭과 대형 수레를 사용했던 전통을 이어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는 발해의 넓은 영토와 활발한 교류를 짐작게 합니다.
문자와 교육: 발해는 유학 교육 기관인 주자감을 설치하여 유학 교육을 장려했습니다. 이는 당나라의 국자감을 모방한 것이지만, 발해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 등에서 발해인들이 뛰어난 문학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의 인재들은 당나라의 빈공과(외국인 대상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명성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온돌 문화: 발해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온돌은 고구려의 주거 문화에서 이어진 것으로, 추운 북방 기후에 적합한 발해인들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이는 당나라나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발해만의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었습니다.
발해의 멸망
찬란했던 해동성국 발해도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10세기 초, 요동 지방에서 급성장한 거란족의 침략을 받아 926년에 멸망하고 맙니다.
멸망의 원인으로는 거란의 강력한 군사력, 발해 내부의 지배층 분열, 그리고 백두산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재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많은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망명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 유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그들에게 성씨를 내려주며 적극적으로 포용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발해를 같은 민족으로 인식하고,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려의 북진 정책은 발해의 옛 영토를 수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발해는 비록 지금은 만주 벌판의 유적들로만 남아 있지만, 그들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자부심과 자존감을 높여주는 소중한 유산입니다.
오늘도 귀중한 시간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