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오늘은 여러 나라의 성장,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그리고 삼한입니다. 이들은 한반도 북부와 중남부를 아우르며 각자의 독특한 색깔로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내용들이지만 한 번 더 복습하는 느낌으로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여
부여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먼저 국가의 형태를 갖춘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2세기경에는 이미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부여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살았는데, 특히 말을 잘 키우기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사회는 왕을 중심으로 마가, 우가, 저가, 구가처럼 동물의 이름을 딴 부족장들이 각자의 지역, 사출도을 다스리는 독특한 체제였습니다.
부여의 대표적인 특징이라면, 바로 영고라는 제천 행사입니다. 매년 12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고, 부족 간의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축제였습니다. 또한, 법률이 매우 엄격했습니다. 특히 살인자에게는 사형을 선고하고 그 가족까지 노비로 삼았으며, 절도를 하는 경우 12배로 배상하라는 1책12법이라는 강력한 법이 있었습니다.
부여는 강성했던 고구려의 압박 속에서도 5세기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지만, 결국 고구려에 흡수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고구려
주몽이 압록강 유역에 세운 고구려는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웅장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나라입니다. 기원전 37년에 건국된 고구려는 주변의 작은 부족들을 하나둘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특히 4세기 말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며 찬란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농사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으로부터 물품을 얻는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험준한 산악 지대에 위치해 농경지가 부족했던 탓에, 대신 뛰어난 무예와 용맹함으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며 영토를 넓혀갔습니다.
고구려에는 제가 회의라는 귀족 회의가 있었는데,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독특한 혼인 풍습인 서옥제는 남자가 여자 집에서 일정 기간 살다가 아이를 낳아 기른 후 본가로 돌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고구려 여성들의 지위가 어느 정도 인정받았음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고구려는 건국부터 멸망까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오히려 끊임없이 대륙으로 뻗어 나가려는 강인한 기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예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자리 잡았던 동예는 고구려 남쪽에 위치했습니다. 읍군, 삼로 같은 군장들이 각 지역을 다스리는 형태였습니다.
동예의 경제는 농업과 어업이 조화롭게 발달했습니다. 특히 바다와 인접해 있어 해산물이 풍부했고, 이를 통해 주변 국가들과 활발히 교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단궁, 과하마, 반어피는 동예를 대표하는 특산물이었습니다. 단궁은 짧지만 위력이 강한 활이었고, 과하마는 키는 작지만 매우 힘이 센 말, 반어피는 바다표범 가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예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입니다. 매년 10월에 열렸던 이 행사는 한 해의 수확에 감사하고 다가올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였습니다. 또한, 동예에는 다른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면 변상하게 하는 책화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동예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5세기경 고구려에 흡수되었습니다.
옥저
동예 북쪽에 위치했던 옥저는 역시 동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 있었습니다. 옥저 또한 왕을 두지 않고 읍군, 삼로 같은 군장들이 각 지역을 다스렸으며,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고구려의 강한 영향을 받았고, 고구려의 수탈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옥저의 경제는 동예와 마찬가지로 농업과 어업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해산물이 풍부하여 고구려에 많은 특산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옥저의 가장 독특한 풍습 중 하나는 바로 민며느리제입니다. 어린 여자아이를 미리 신랑 될 집으로 보내 키우고, 성인이 되면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는 풍습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의 특수한 혼인 형태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또한, 옥저 사람들은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임시로 매장했다가 나중에 뼈만 추려 목곽에 넣고 가족 공동 무덤에 안치하는 가족공동묘(골장제)라는 장례 풍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한(마한, 진한, 변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는 여러 작은 부족 국가들이 모여 삼한이라는 거대한 연합체를 이루었습니다. 삼한은 크게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며, 각각 수많은 소국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농업이 크게 발달했고, 특히 벼농사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삼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제정 분리 사회였다는 점입니다. 정치적 지배자인 신지, 읍차 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군이라는 제사장이 따로 존재했습니다. 천군이 다스리는 신성한 지역인 소도에는 죄인이 도망쳐 들어와도 함부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신성시되었습니다. 이는 권력이 종교적 권위와 분리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마한은 한강 유역에서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 걸쳐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했습니다.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특히 목지국이 맹주 역할을 했습니다.
진한은 낙동강 동쪽에 위치했으며,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사로국이 맹주 역할을 했습니다. 이 사로국은 훗날 신라로 발전하게 됩니다.
변한은 낙동강 서쪽에 위치했으며, 역시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변한은 특히 철이 풍부하여 낙랑, 일본 등 주변 국가들과 활발한 교역을 펼쳤습니다. 심지어 철을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했으니, 당시 철의 가치가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한에도 중요한 제천 행사가 있었습니다. 5월에 씨를 뿌리고 난 후 풍년을 기원하는 수릿날과 10월에 추수를 마친 후 열리는 계절제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춤추며 즐겼다고 합니다.
삼한은 훗날 마한은 백제로, 진한의 사로국은 신라로, 변한은 가야로 발전하며 찬란한 삼국시대의 문을 여는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여러 나라의 성장,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삼한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강인한 기상으로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 북방의 전통을 지키려 했던 부여,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영위했던 동예, 옥저, 삼한까지.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꿈꾸게 하는 소중한 영감의 원천입니다.
독자님들이 이 글을 통해 여러 나라의 성장에 대해 이해하시는 시간이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도 귀중한 시간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